매화를 찾아서

장정완의 에세이 제 13편

안성프리즘 | 기사입력 2020/03/06 [11:44]

매화를 찾아서

장정완의 에세이 제 13편

안성프리즘 | 입력 : 2020/03/06 [11:44]

 추운 겨울이 물러가고 어디선가 따스한 기운이 스며들 즈음에, 봄을 알리는 전령처럼 남녘에서 매화꽃이 피 웠다는 소식이 들리면 무거웠던 몸은 이내 가벼워진다. 깊은 산골 시냇물이 눈 덮인 얼음 사이를 뚫고 흘러내리듯 봄소식은 온 산천에 퍼져 나간다. 그런데 여전히 날씨는 을씨년스럽고 봄은 아직 오지 않았다. 매화는 이렇게 겨울과 봄 사이에 피어난다. 차가움과 따스함이 교차하는 시기에, 매정함과 다정함이 만나는 정감 속에서, 무거움과 가벼움이 뒤 섞이는 공간에 피어난다. 그래서 매화는 순결하고 또한 요염하다.

 

  © 매화

 

아치고절(雅致孤節)로 표현되는 매화는 은자나 선비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매화는 남성 가운데 가장 고아한 품격을 지닌 존재로, 여성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존재로 상징된다. 한겨울에 추위를 이기고 메마른 가지 위에 피어난 매화는 그 모양도 깨끗하지만 그 향기 또한 은은하여 밝고 맑은 영혼을 상징한다. 그래서 많은 수식어가 탄생했는데, 밤이 깊어 사위가 적막할 때 비로소 먼 곳에서도 스며드는 은은한 향기를 암향(暗香)이라 부른다. 또한 매창(梅窓)이라 하여 달빛에 매화 그림자가 창문에 비치는 것을 뜻하고, 소영(疏影)이라고 하면 그 매화가 바람에 흔들리는 어렴풋한 그림자의 이미지를 가리킨다. 암향 속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아름다움은 오감을 통해서도 쉽게 감지할 수 없는 그 어떤 육감적인 것, 그래서 어쩌면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닌 그 근원을 알 수 없는 저 세계의 통로에서 흘러나오는 미감일지도 모른다.

 

소나무, 대나무와 함께 모진 겨울을 나는 매화를 세한삼우(歲寒三友)라 하여 옛 선비들은 즐겨 시와 그림의 소재로 삼았다. 매화를 유달리 사랑한 인물로는 퇴계 이황을 들 수 있는데 그는 매화가 피어나는 겨울 섣달 초순에 임종하면서 매화에 물을 주어라.”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매화를 노래한 수많은 옛 시들이 전해 오지만 고려시대 문인인 진화(陳澕)의 시는 참으로 아름답다.

봄의 신이 뭇 꽃을 물들일 때/ 맨 먼저 매화에게 옅은 화장을 시켰지/ /옥결같은 뺨엔 옅은 봄을 머금고/ 흰 치마는 달빛이 서늘해라.

이 얼마나 멋들어진 시인가?

매화를 화장한 미녀로 묘사한 것은 당시의 시대상에 비추어 대담 솔직하며 파격적이기까지 하다. 매화의 서늘함과 농염함이 어우러져 그 이미지를 잘 표현하고 있다. 매화 향에서 풍기는 봄의 전조와 꽃잎에서 연상되는 여인의 하얀 옷자락은 현대인에게도 아주 쿨(COOL)한 감각으로 다가오며 달빛 속의 여인처럼 그윽하고 애상적이다.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문학과 예술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매화는 동양적 정신의 표상물로서 가장 뚜렷하게 각인되어 있다. 매화라는 상징적 매체를 통해 선비들의 정신세계는 '지조(志操)''은일(隱逸)'이라는 두 갈래의 개념으로 표출된다. 조선시대 유교적 가치관은 이 세상에 나아가 뜻을 펼치고 임금의 신하로서 도리를 다하는 것이다. '지조'는 이런 의미에서 어떤 혹독한 시련을 통해서라도 자신의 올바른 뜻이 받아지리라는 것을 암시한다.

반면 현실세계는 여전히 춥고 가혹한 겨울 속에 잠겨 있으나, 자신이 모르는 곳 미지의 세계 그 어디엔가는 평화로운 이상적 세계가 존재할 수 있다는 상상은 매화가 여전히 겨울철 임에도 불구하고 눈 속에서도 꽃을 피운다는 현상에서 발생된 개념이다. 이상세계를 향한 염원은 동양권의 한 사상적 갈래인 노장사상에서 발원한 도가적 이념세계에 맥이 닿아있다. 노장사상에서 말하는 무위자연의 세계를 추구하는 것, 이것이 '은일'에 대한 관념이다.

 

매화는 유교적 상징인 '지조'와 도교적 상징인 '은일'의 관념 그 모두를 포섭하는 사상적 매개체로서 작용하게 되는데, 그 사상적 기반이 반드시 상반되거나 대립되는 것으로 표출된다고 여겨지지는 않는다. 유교적 세계에서 이상적 인물상을 예시하는 것은 '군자'이다. 군자는 현실참여를 통해 그 의지를 실현시키는 존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의 정신세계는 자연과의 합일을 지향한다.

 

  © 신잠의 <탐매도>


나는 언젠가 옛 그림을 보다가 신잠의 <탐매도>를 보고, 이 그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는데 최근에야 심오한 의미가 숨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탐매도는 선비가 눈길에 매화꽃을 찾아 나서는 정경을 주제로 하고 있다.

적막감이 감도는 설경을 배경으로 한 선비가 말을 타고 다리를 막 건너려고 할 때,

문득 뒤따르는 동자의 발걸음이 더디다고 느꼈던지 고개를 돌려 빨리 오라고 재촉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러나 동자는 매화를 찾는 주인의 마음 따위는 아랑곳 없이 그저 춥고 피곤한 느낌뿐인 것 같다.

미술사학자 허균은 <나는 오늘 옛 그림을 보았다>에서 이렇게 말한다.

“<탐매도> 가 상징하는 세계를 살펴보면, 선비가 건너는 다리는 현실세계와 이상세계를 가르는 경계선을 의미하며, 다리를 건너지 않으려고 거부하는 동자는 현실세계에서 안주하려는 세속인의 입장을 대변한 것이고, 다리 건너편에 피어있는 매화는 도()의 형상적 실체를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 심사정의 '<파교심메도>


다리를 건너간 선비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선비들이 꿈꾸던 이상세계의 모습을 조희룡의 <매화서옥도>나 전기의 <매화초옥도>에서 만날 수 있다. 자유분방한 필치로 그린 조희룡의 <매화서옥도>는 화면 중앙에 거대한 산중 매화나무가 위치하여 화면을 압도하는 동시에 나무의 가지를 따라 시선을 분산시킨다. 거칠게 그려진 거대한 산봉우리를 배경으로 매화는 이윽고 산골짜기를 채우며 수를 놓듯 피어난다. 그 매화 꽃이 눈꽃처럼 흩날리는 가운데 조그만 초옥에서 선비가 글을 읽고 있는 모습은 과히 선경이라 할만하다. 깊은 산 중의 매화나무와 인간이 자연과 일체감을 이루고 있는 세계를 기운생동(氣韻生動)하게 표현하고 있다.

 

몇 년 전 봄기운이 무르익어가는 어느 봄날 오후, 움터오는 숲속에 봄의 향기를 맡아볼까 싶어 카메라를 둘러메고 산속을 헤집고 다닐 적에 관목 숲 너머로 문득 선연한 광채가 내비치었다. 매화 한그루가 수줍은 꽃망울을 머금고 피어있는 것이 아닌가. 덤불 숲속의 빈터, 허물어져 가는 무덤가에 홀연히 피어나는 매화 한그루의 호젓함이라니. 날은 차츰 어두워져 가나, 희부윰한 어둠 속에 내비치는 꽃의 광채는 점점 더 밝아졌다. 온 사위는 매화 향기에 물들어 은은하고, 적막한 숲속에 홀로 핀 매화의 자태는 맑고 고혹적이어서 형용할 수 없는 그윽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래서 매화 시 한 수 지어 읊어 보았다.

 

  © 조희룡의 <매화서옥도>

 

엄동설한 매서운 바람 사이를 비집고 봄의 전령은

어느새 매화 등걸에 한점 생의 욕망을 찍어 놓았구나

밤하늘의 별들도 지혜를 모으려 하나니

아득한 날 피어나는 매화는 차가운 수줍음

바람에 나부끼는 처녀의 옷자락을 걷어 올리고

너는 미풍 속에 잉태하는 꿈의 표식인 것을

그리움이 사무치면 삭풍도 사그라지는 법

너의 의지는 무르익어 이제 막 춤추려 한다 <>

 

 

-에세이스트 장정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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