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랑 김윤식, 최승희와 목숨건 사랑 결실을 못 본 한(恨)을 품은 동백나무

최승희 특집 3편 - 전남 강진 영랑생가를 찾아서

김종열 기자 | 기사입력 2020/11/24 [08:01]

영랑 김윤식, 최승희와 목숨건 사랑 결실을 못 본 한(恨)을 품은 동백나무

최승희 특집 3편 - 전남 강진 영랑생가를 찾아서

김종열 기자 | 입력 : 2020/11/24 [08:01]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즉 나의 봄을 기둘리고 잇슬테요

모란이 뚝뚝 떠러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흰 서름에 잠길테요

 

五月 어느날 그 하로 무덥든 날

떠러져 누운 꼿닢마져 시드러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최도 업서지고

뻐처오르든 내 보람 서운케 믄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해는 다 가고 말아

三百예순날 하냥 섭섭해 우옵네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즉 기둘리고 잇슬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이 시는 소월의 진달래꽃과 같이 이별의 아린 연정을 모란의 떨어지는 모습에 담아 노래한 전형적인 연시(戀詩)이다. 1934문학’(文學)지에 발표했고, 이듬해인 1935년에 간행된 영랑시집’(永郞詩集)에 실렸다. 목숨건 영랑과 최승희의 실연은 영랑에게 두고두고 상처가 오래 지속됐던 것이다.

 

▲ 영랑 김윤식


'북 소월 남 영랑'이라 세간에 불리어 왔다. '진달래꽃'을 쓴 김소월(1902.8.6.~1934.12.24)과 더불어 우리 시문학사에 쌍벽을 이루는 김영랑(金永郞, 1903.1.16.~1950.9.29.)이 지은 시

모란이 피기까지는은 함께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면서 를 추구하는 주제로 씌어져 아직도 많은 문학인들에게 애송되고 있다. 이 시는 최승희(1911~1967)를 빼고는 논할 수 없다.

 

영랑 김윤식 선생은 1903116일 전남 강진에서 아버지 김종호와 어머니 김경무 사이 2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유한 지주 집에서 태어나 한학을 배우며 자란 선생의 이름은 어릴 때에는 '채준'으로 불렀으나 뒤에 윤식으로 바꿨다. 아호 영랑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시문학>에 작품을 발표하면서부터다.

 

영랑(1903~1950)은 호방하고 야성적인 풍모를 가진 운동선수 출신의 시인이었지만 그의 많은 시들은 섬세하고 연약한 여성적인 성향을 품고 있다.

애주가였던 영랑은 모란이 피는 오월이면 술도 노래도 멀리하고, 모란꽃을 벗삼아 지냈다. 꽃은 화려하고 향기도 진하다. 그는 300여그루의 모란에서 피어나는 꽃을 보면서 가장 깊은 슬픔에 기꺼이 견뎌냈다고 한다. 영랑은 이별과 슬픔의 시인이다. 이별과 슬픔을 특별하게 나타내는 것이 모란이다. 두어 편에 불과한 모란 관련 시로 그는 대표적인 모란 시인이 되어버렸다. 모란으로 향유한 그의 이별과 슬픔은 그때까지 조선 땅에는 없던 종류의 것이었다.

 

영랑이 음악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었고 그의 여성 편력 또한 두루 잘 알려진 바 있다.

첫 부인과 사별한 영랑은 2년 뒤 18세 때 이화여전을 나와 하숙하던 강진보통학교 여교사 마재경과 열애에 빠지만 그 사랑은 영랑이 일본 유학길에 오르면서 끝을 맺는다.

   

영랑은 일본 유학에서 최승희의 오빠인 최승일을 벗으로 만나 사귀었다. 영랑은 일본에서 큰 음악회가 열리면 나비넥타이를 매고 관부연락선에 몸을 실어 시모노세끼로 갈 정도로로 음악을 좋아했다.

 

▲ 최승희(1929년 사진)


그 뒤 귀국한 영랑은 22세 되던 해 정지용 등과 만나며 서울에서 열리는 음악회 역시 빼놓지 않고 다녔다. 서울에 다니러 갈 때면 최승일의 집에 유숙한 때가 많았다. 그때 자연스럽게 13살이었던 최승희를 만났다. 관동대지진으로 일본유학 중에 귀국한 1923~4년 경의 일이다.

 

오빠 최승일의 친구인 영랑이 품은 예술에 대한 사랑과 열정은 최승희의 환심을 사기에 충분했고 김영랑 역시 고전무용가로 전도가 유망한 최승희의 세련된 모습에 깊은 연모의 정을 느낀 것 같다. 1년여 서로에게 향하는 불타오르는 목숨건 사랑에 결혼을 약속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두 집안은 그 사랑을 허락하지 않았다.

  

▲ 영랑이 목을 맸던 동백나무가 휘어진 채로 늘어져 있다.

 

강진의 절대부호였던 영랑의 집안에서는 춤이나 추는 경성의 신여성은 우리 가문에 필요 없다'는 이유로, 최승희 집안에서는 영랑이 호남 사람이라는 이유로 서로 반대해 영랑과 최승희 두사람은 사랑의 결실을 보지 못하게 되자 영랑은 그 아픔을 참지 못해 지금 생가 본채의 오른쪽 뒤편 대나무 숲 앞에 드리워진 동백나무에 목매달고 자살을 시도하다가 발각돼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영랑 생가에 장독대 쪽으로 가지를 길게 늘어뜨린 나무가 바로 그 나무다.

봄날의 풋사랑 같은 이 사연을 뒤로 하고 최승희는 일본으로 건너가 당대 최고 무용가의 길을 걸었고, 영랑은 그 빈자리를 시로 채웠다. ‘찬란한 슬픔의 봄은 해마다 그의 가슴을 아리게 했다.

 

▲ 영랑생가의 뒤편 뜰을 가득 채운 모란나무들


최승희와의 이별의 슬픔을 극복하는 데 몹시 힘들었을 터이고, 뚝뚝 져 있는 모란의 모습이 시인의 심사를 대변하기에 적격이었을 것이다. 기자가 11월 22일 찾아간 영랑의 생가 뒤편 뜰에는 아직도 겨울을 맞는 모란나무 가지들이 앙상한 모습으로 포진되어 있었다.

 

영랑의 셋째 아들 김현철씨가 쓴 책 <아버지 그립고야>에서 영랑의 인간적 면모를 보여주는 아래의 대목들이 있다.

  

▲ 미뇽

 

첫 짝사랑 미뇽

호방한 성격의 영랑은 사진 속 여인의 아름다움을 보고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진다.그가 일본 청산 학원 재학시절(1920~1924), 당시 세계적인 미인으로 정평이 있던 프랑스의 미인 미뇽(Mignon)의 그림엽서 한 장을 구했다. 사진 속의 미뇽은 화장기가 전혀 없는 청순한 얼굴에 핑크 빛 반소매 상의와 검은 바탕에 빨강 무늬가 있는 치마를 입고 있으며 왼 손으로는 만돌린을 겨드랑이 밑에 낀 채 오른 손은 오른 쪽 검은 곱슬머리를 뒤쪽으로 대고 비스듬히 서있는 요염한 음악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 청순하고도 요염한 미인의 사진을 보고 영랑은 너무도 감격해서 이 미인의 모습 때문에 내 청춘이 병들었노라며 울었다고 한다. 그는 이 그림엽서 뒷장에 시를 썼고 그의 첫 번째 시집인 <영랑시집> 첫 페이지에 그대로 실었다.

 

"달밤에 이슬아침에

내 미뇽을 안고 울기를 몇 번이던고

청산은 내 청춘을 병들게 하였거니와

오히려 향내를 뿌리워 준다

시를 외우던 때 시적이던 때

눈물은 누물로 맞으려던 때

그 때 이미 내 청춘은 병들었으나

한그릇 향훈은 늙지를 않네

 

결혼 그리고 재혼

1903년에 태어난 김영랑은 1915년 가진 보통학교를 졸업한다. 1917년 휘문의숙에 입학해 상경하기 직전에 부모의 결정에 따라 두 살 위인 김은하(金銀河-본명 김은초 1899~1917)와 결혼했다. 우리 나이로 15세 때다. 아름다웠고, 누이같이 다정했던 부인은 이듬해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학교에 다니고 있던 김영랑은 부인의 죽음을 지키지 못한 것을 내내 애통해 했다고 한다. 그런 김영랑의 마음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시가 바로 쓸쓸한 뫼 앞에서이다.

 

쓸쓸한 뫼앞에 후젓히 앉으면

마음은 갈앉은 양금줄 같이

무덤의 잔디에 얼골을 부비면

넋이는 향맑은 구슬손 같이

산골로 가노라 산골로 가노라

무덤이 그리워 산골로 가노라

 

이제 사춘기에 들어서는 나이 어린 소년에게 첫 아내의 죽음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누이의 죽음처럼 청천벽력 바로 그것이었으리라.

  

▲ 김귀련과의 결혼식(1925)

 

 그런후 만 8년이 흐른 후 옛 애인 최승희의 축하 속에 영랑이 열네 살 어린 소년의 몸으로 첫 번째 결혼 1년여 만에 있었던 상처(喪妻)의 쓰라림을 경험한 지 만 8년 후인 1925, 20세의 개성 처녀 호수돈 여고 출신인 김귀련(金貴蓮=1906~1989)(당시 미 선교사가 창설한 강원도 원산 루씨 여중고 교사)을 맞아 개성 중앙교회에서 여운형(1886~1947, 독립운동가, 2005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의 주례로 재혼해 슬하에 73(2남인 김현복은 생후 1년 뒤 사망)를 두게 된다

 

이 결혼식에는 얼마 전 서로가 열렬히 사랑했으나 무용가 지망생은 장손 며느리가 될 수 없다'는 영랑의 완고한 부친의 반대로 서로의 뜻을 이루지 못했던 최승희가 본격적인 무희 수업 직전인 숙명여고생의 몸으로, 오빠 최승일 시인과 함께 옛 애인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결연히 나섰다.

 

동생 김하식의 결혼 성공시키다

최승희와의 비련의 쓰라림을 겪었던 영랑은 자기가 가장 사랑하던 동생 하식(1914~1949, 일본 와세다대 영문과 졸업)의 예비신부가 소프라노 성악가 지망생(이화여전 성악과 재학)이라는 이유로 부친의 결혼 반대에 부딪치자, 자신이 겪었던 똑같은 쓰라림을 동생에게 안겨주고 싶지 않아 부친을 끝까지 설득해 결국 동생의 결혼을 성공시켰다고 한다.

 

인생의 거의 모든 삶은 강진에서

영랑의 삶은 전라남도 강진을 거의 벗어나지 않았다. 그가 강진을 떠나 있었던 것은 서울로 올라와 휘문의숙에 재학한 1917년부터 1919년까지의 2년 동안과 1920년 일본으로 건너가 청산학원에 입학하여 학업을 밟다가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귀국할 때까지 3년간의 기간이 전부다. 5년간의 수학 기간을 제외하면 그는 해방이 될 때까지 고향 강진에 뿌리를 박고 생활하였다. 9·28 서울 수복 때 포탄 파편에 맞아 삶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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