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파 인물사 - 한국의 마타하리 배정자(田山貞子:다야마 사다코)

조선인들은 그를 본명' 배분남이 '아닌 '배정자'라고 불렀다.

김종열 기자 | 기사입력 2020/05/30 [15:59]

친일파 인물사 - 한국의 마타하리 배정자(田山貞子:다야마 사다코)

조선인들은 그를 본명' 배분남이 '아닌 '배정자'라고 불렀다.

김종열 기자 | 입력 : 2020/05/30 [15:59]

 

▲ 배정자 <- 배분남 -> 田山貞子(다야마 사다코)


1.이토히로부미의 양녀

이토 히로부미 양녀로 일본에 충성을 바친 조선여인이 하나 있었다. 그녀는 배분남으로 1870년 경남 김해에서 아전 배지홍의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 배지홍이 민씨들의 권세를 반대하다 흥선대원군의 일파로 지목되어 사형을 당하자 그녀는 천민 거지가 되어 유랑생활을 하다가 기생으로 팔려갔고 곧 도주해 승려가 되었다.

승려생활 중 탈주해 아버지와 친했던 동래부사 정병화에 의탁했다. 정병화는 1885년 배분남을 일본으로 보냈다. 일본에서 배분남은 갑신정변의 실패로 일본에 와 있던 김옥균을 만나고 김옥균은 1887년 한일병탄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에게 그녀를 소개해 그녀는 이토의 양녀가 되었다.

배분남은 머리가 좋고 타고난 미녀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장미꽃 같은 18세 소녀 배분남을 보자 홀딱 반하여 양녀로 삼았다. 이토는 친구들과 도쿄 신바시의 화류계를 누비고 다니는 색마인지라 일본 여인과는 색다른 매력을 발산하는 조선 미인 배분남을 그냥 두지 못해 첩으로도 삼았다.

이토는 배분남에게 일본 이름인 전산정자(田山貞子:다야마 사다코)를 붙여주고 수영, 승마, 사격, 국제예절, 변장술 등 스파이 활동에 필요한 모든 것을 가르쳤다. 조선인들은 그녀를 배정자라 불렀다. 이토는 밀정교육을 받은 배정자를 1894년 조선으로 보내 하야시 공사의 통역으로 고종에게 접근시켰다.

 

2. 고종에게 퇴위 강압하고 독립운동가 체포 위한 일제 밀정 활동을 하다

배정자는 타고난 미모와 애교에다 일본에서 배운 승마술, 일본어, 국제예절이 더하여 그야말로 최고의 지성미에다 멋을 갖춘 여인이었다. 궁에서 유교식 예절 교육만을 받아 임금 앞에서 제대로 머리도 못 들고 묻는 말에 겨우 모기 같은 목소리로 대답하는 궁중 여인들만 보다가 하얀 이를 살짝 드러내면서 애교가 듬뿍 담긴 웃음을 지으며 접근하는 미녀 배정자를 보자 고종은 그녀에게 홀딱 반하였다. 고종을 손아귀에 넣은 배정자는 조선의 최고기밀을 빼내는 등 일본의 특급 스파이 역할을 쉽게 해낼 수 있었다. 배정자 암호명은 흑치마였다.

배정자라는 누이를 잘 둔 덕분에 오라비와 동생은 한성 판윤 등 고위관직에 올라 권력을 휘둘렀다. 1905년 을사늑약 후 고종에게 퇴위 압력까지 행사했던 배정자는 한일합방 후 만주로 가 독립운동가 체포를 위한 일본군 스파이 활동을 했다.

항일 독립운동 조직에서 배정자를 처단 대상자로 지정하자 그녀는 신변의 위협을 느껴 조선으로 왔으나 곧 조선을 떠나 상해와 만주 등을 다니면서 192758세 때까지 일본제국을 위한 스파이 활동을 계속하였다. 그 대가로 조선 총독부는 그녀에게 토지를 주고 해방이 될 때까지 매월 급여를 지급했다.

 

3. 30세 연하 일본순사 및 마적단 두목과 동거할 정도로 화려한 남성 편력

배정자는 첫 남편이 병사한 후 현영운과 재혼을 하였다. 그러나 현영운과 1년 정도 살다가 딸 하나를 낳고 이혼했다. 그 후에 현영운의 친구이자 친일파로 일본 육사 15기 출신인 박영철과 결혼했다. 박영철과 살림하다 이혼한 후 배정자는 연하의 부잣집 아들들과 살림을 했다.

51세 때 시베리아에서 일본군 첩자로 활동 중 마적단 두목과 동거하면서 정보까지 빼낼 정도로 대담했다. 55세 나이에도 30년 아래인 25세 일본순사와 동거할 정도로 그녀는 농염했다. 그녀에게 지켜야 할 윤리나 규범은 전혀 없었다. 오직 일본제국을 위한 스파이 활동을 하고 대가로 대접을 받고 돈도 벌어 연하의 남자들과 섹스를 하며 인생을 즐겼다.

 

4. 배정자 딸 윤보선 전 대통령 백모였지만 윤 대통령은 독립운동 참여

배정자의 두 번째 남편 현영운은 역관 집안 출신으로 관비 유학생으로 일본의 게이오 의숙을 졸업한 지식인이었다. 현영운은 부인 배정자 덕분에 고속 승진하여 육군 참장 및 농상공 협판(차관)까지 올랐다. 소설가로 유명한 현진건이 현영운의 조카이므로 배정자는 현진건의 숙모였다.

배정자와 현영운과 사이의 딸이 현송자이다. 모친 배정자를 닮아 미인에다 일본 유학도 하여 지성미를 갖춘 사교계의 꽃으로 학무국장 출신 윤치오의 세 번째 부인으로 결혼했다. 서울대 총장을 지내고 한국 의학계 발전에 공이 많은 윤일선 박사가 윤치오 장남이므로 현송자는 윤일선 총장의 계모였다.

윤치오는 윤보선 전 대통령의 백부였다. 그러므로 배정자의 딸 현송자는 윤보선 전 대통령 백모였던 셈이다. 그러나 윤 대통령은 친일하지 않고 독립운동을 해 명망이 높았다. 젊은 미인 현송자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부친 현영운을 위해 30년 연상의 윤치오와 결혼했으나 교회에서 4세 아래 남자인 연희전문 학생 이철을 만나 불륜관계에 빠져 이혼했다.

이혼 후 이철과 결혼해 이철이 1933년 오케 레코드사를 출범시키도록 적극적으로 도왔다. 가수 이난영, 남인수, 김정구, 장세정, 백년설 등이 오케 레코드 전속이었고 작곡가 박시춘, 손목인 등이 작곡가로 활동했다. 기독교 신자였던 현송자는 남편 이철이 사망한 후 독실한 신자로 살다가 79세에 사망했다.

배정자 조카딸 배구자도 미인으로 배정자의 주선으로 일본에서 무용을 배워 조선 전통무용의 현대화와 발레의 접목을 시도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녀는 남편 홍순언과 함께 1935년 동양극장을 설립하여 해방 전에 조선의 공연계를 화려하게 장식했다. 이렇게 배정자 딸과 조카는 당시 식민지 조선의 가요계, 무용계, 연극계 등 대중예술계를 주름잡았다.

  

5. 70대 배정자 동족 여인들 일본군 성노예로 팔아넘기고 돈 챙겨

194112월 일본군의 미국 하와이 진주만 기습폭격으로 태평양전쟁이 시작되었다. 그 때 배정자는 70세가 넘은 노파였다. 당시 식민지 조선에서는 신문과 방송 등을 통해 일본군 위안부 모집광고까지 했는데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만이 이를 거절하였다. 일본군 밀정을 해 왔던 할머니 배정자는 일본군부와 조선총독부의 뜻에 따라 조선여인들로 위문대를 조직하고 일본군 성노예 위안부 송출 했다. 그녀는 일본군의 변태적 성욕을 채워주기 위해 100명의 조선여인으로 위안대를 조직하여 남태평양의 섬까지 데리고 가서 일본군 성노예를 시켰다.

성노예로 끌려간 불쌍하고 젊은 조선여인들은 이역만리 남방 하늘 아래에서 일본군에게 변태적이며 엽기적인 성폭행을 당하였다. 그녀들은 약 1평 정도의 골방에 갇혀 일본군들에게 하루 30번 이상의 성행위를 강요당해 심신이 다 망가졌다.

일본군들은 그녀들을 구타하는 것은 보통이고 그녀들의 몸에 상처를 내는 등 성적 학대를 하였다. 배정자는 동족 여인들의 뼈가 사무치는 고통과 모욕의 대가로 금품도 받아 챙겼다.

 

 6. 배정자는 초라하게 죽었으나 다른 고위 친일 인사들 영화 누려 

배정자는 어린 시절 민씨 권력에 의해 아버지가 사형당해 천민이 되어 고생하다가 한일병탄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만나 양녀이자 첩이 되었다. 항일 애국지사들 체포를 위한 일본의 특급 스파이 활동 및 위안부 송출을 한 그녀는 해방 후 1949년 반민특위에 체포되었다. 그러나 반민특위가 곧 해체되어 풀려 나와 한국전쟁 중인 195283세의 나이로 초라하게 죽었다. 그녀의 어린 시절 상처가 친일의 한 원인이 될 수는 있어도 그녀가 항일애국지사들과 동족 여인들에게 입힌 상처와 조국에 대한 피해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출처 : 올바른 역사학당 관리자 김민수

 

 

▲ 마타하리


마타 하리(Mata Hari, 187687일 네덜란드 레이우아르던 ~ 19171015일 프랑스 파리)는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첩자 혐의로 처형된 네덜란드 출신의 무용가인 마르하레타 헤이르트라위다 젤러(네덜란드어: Margaretha Geertruida Zelle)의 가명이다.

 

네덜란드의 안정적인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그녀의 아버지가 파산했다. 그녀는 네덜란드 군대의 대위가 낸 배우자를 구하는 광고에 응해 그와 함께 잠바로 갔다. 그 후 190226세가 된 그녀는 파리에 나타났다. 그녀는 풍만한 금발 미녀가 아니라, 키가 크고 몸매가 가냘프고 피부색이 어두워서 동양 미녀의 모습에 가까웠다. 당시 프랑스에서 고급 매춘부의 황금시대는 끝나가고 있었다. 때문에 자와섬에서의 경험과 관능적인 외무를 이용해 마타 해리라는 이름으로 거의 옷을 입지 않은 채 '동양적인' 춤을 춤으로써 출세의 길을 개척했다

 

그녀는 재능이 많고 개성이 강한 여인이었으나, 당시 프랑스인들과 독일인들 사이에서 생겨나고 있던 반감과 자신이 받고 있던 의심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녀의 기본적인 생활 방식은, 무엇이든 남성이 요구하는 일을 해줌으로써 불확실하지만 상류생활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19147월 전쟁이 발발했을 때 그녀는 베를린에서 공연을 하고 있었다. 단지 댄서로 고용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지만, 그녀의 애인들 중에는 해군 장교와 육군 장교, 그리고 베를린의 경찰서장도 있었다.

 

마타 하리는 중립국인 네덜란드로 돌아간 후 그곳에서 부유한 반 데어 카펠렌 남작의 경제적인 후원을 받았지만, 네덜란드에서의 생활은 지루하고 편치 못했다. 어느 날 독일 영사 크라머가 그녀에게 접근했고, 그녀는 프랑스 돈 2만 프랑을 조건으로 프랑스의 군사 기밀을 알아 오라는 제의를 수락했다(그녀는 그럴 의도가 없었다고 항상 주장했다). 그녀는 네덜란드에서 배를 타고 먼저 영국으로 갔다. 그곳에서 스파이 혐의로 체포되었지만, 네덜란드로 돌아가지 않고 스페인으로 간다는 사실을 알고 그들은 그녀를 풀어주었다. 스페인에서 그녀는 독일의 권력자들과 어울렸고, 어쩌면 '첩보원 H-21'로 임명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녀의 목적은 파리였다. 그녀는 당시의 일류 댄서인 디아길레프와 만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파리에서 정보원의 국장 라두아는 마타 하리에 관한 경고를 듣고 그녀에게 프랑스 편에서의 스파이 활동을 제의했다. 그녀는 긍정적인 의사를 표하고 백만 프랑을 요구했다(돈은 준비되어 있지 않았지만 라두아는 그녀의 본성에 대한 의심을 굳혔다). 당시 그녀는 상당한 돈을 받고 있었고, 특히 반 데어 카펠렌에게서 받는 돈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 엄격한 프랑스의 정보 장교들이 보기에 그 액수는 단순한 정부가 받기에는 지나치게 많아 보였다.

 

1917213일 아침 그녀는 샹젤리제의 엘리베 팔라스 호텔에서 체포되었다. 그녀는 이때부터 621일까지 생 라자르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으면서 강도 높은 심문을 받았다. 그녀는 고급 매춘부에게 필요한 사후 피임 용품으로 살정자제 스프레이를 가지고 다녔는데, 심문관은 이것을 눈에 보이지 않는 잉크라고 확신했다. 결코 전문적인 스파이가 아니었던 그녀는 터무니없이 부주의했다. 그녀의 무죄를 주장하는 샘 와게나는 그녀가 '스스로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고 말한다. 1917724일부터 25일까지 이틀이 채 안 되는 재판 과정을 거쳐 군사위원회는 그녀에게 여덟까지 간첩 혐의에 대한 유죄 판결을 내리고, 총살형을 선고했다. 1015일 그녀는 파리 중심부에서 뱅센의 군사지역으로 이송되었고 이곳에서 즉시 형이 집행되었다. 마타 하리는 사형대에 묶이거나 눈가리개를 쓰는 것을 거부하고 용감하게 죽음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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